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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여러분, 그리고 아버지를 아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는 아들로서, 장례식에 선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사랑한 아버지, 박문수, 문수 아버지를 보내드리며 그 삶을 기리고자 합니다.
1954년 8월 22일 부산에서 태어나시고, 2026년 4월 12일, 향년 71세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한 생애를 숫자로만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이 두 날짜 사이에는 한 사람의 성실함과 책임, 그리고 조용한 유머로 다진 긴 시간의 결이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공대를 졸업하고 조선소에서 30년간 기계설계 엔지니어로 일하셨습니다. 거대한 선체 안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부품 하나가 전체의 안전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고, 도면 한 줄에도 사람의 시간이 실린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마감 시간은 약속이고, 약속은 곧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하셨습니다. 퇴직 후에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중소기업 기술자문으로 현장을 다니며 “후배들이 더 나은 실수를 하게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역 청소년 공학 캠프에서도 멘토로 참여하시며, 너트와 볼트를 처음 만지는 아이들에게 렌치를 쥐여주고, “정확함은 손끝의 습관에서 나온다”는 말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전해주셨습니다.
집에서는 엄격함과 따뜻함이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시간을 어기는 일에는 단호했지만, 이유를 묻는 일에는 누구보다 느긋했습니다. 이치에 맞는 설명이 있으면 웃으면서 한 번은 넘어가 주셨지만, 다음엔 더 잘하자고, 그 약속을 꼭 지키자고 덧붙이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투에는 꾸지람과 격려가 절반씩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짧은 농담 하나가 따라왔습니다. 긴장이 풀리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 고개 끄덕임이 이상하게도 우리를 앞으로 한 발 더 움직이게 했습니다.
제가 가장 또렷이 기억하는 장면은 초여름 해질녘의 방파제입니다. 붉고 주황빛이 섞인 하늘 아래, 파도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부서질 때, 아버지는 낚싯줄을 던지는 각도를 가르치듯 제 손목을 살짝 잡아 주셨습니다. “성급하면 미끼도 긴장한다.” 그러고는 미뤄뒀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의 오해, 다음 주에 해야 할 선택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듣고 계셨고, 간간이 던지는 한마디가 묵직하게 마음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작업대가 기다렸습니다. 줄자 끝을 잡는 법, 못의 머리를 때릴 때 망치가 손목과 하나가 되는 느낌, 그리고 마지막에 사포질을 할 때 결을 따라 가야 하는 이유. 어느 날엔 제 방에 놓일 작은 선반이, 어느 날엔 동생 책상이 그렇게 완성됐습니다. 그 선반과 책상은 지금도 견고합니다. 흔들어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손이 닿은 물건은 대체로 오래갔습니다. 사람에게 남긴 말도 그랬습니다. 오래갔습니다.
아버지는 목공을 사랑했습니다. 나무가 마르는 속도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성급함은 사치라고, 그래서 커피 한 잔의 온도처럼 일의 리듬을 맞추라 하셨죠. 주말이면 등산화 끈을 단단히 묶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정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크게 보면 단순하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은 기술 설계에도,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아버지의 원칙이었습니다. 어느 조용한 오후엔 서예 붓을 들고 먹을 가는 소리로 시간을 시작하셨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마음, 시간을 아끼는 마음,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을 글씨에 새기듯, 하루를 그렇게 단정하게 묶으셨습니다.
박문수라는 이름이 직장에서 ‘정밀’과 ‘책임’으로 기억된다면,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는 ‘기준’이라는 단어로 기억됩니다. 45년을 함께 걸어오신 어머니 최영희 여사와의 삶은 그 기준의 따뜻한 얼굴이었습니다. 두 자녀와 세 손주를 둔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가족의 시간을 설계하듯 조율했습니다. 불필요한 과장은 없었고, 필요한 배려는 언제나 제때였습니다. 손주들이 오면 아버지는 작업복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과일을 깎았습니다. 칼 끝에서 떨어지는 얇은 과일 껍질이 길게 이어지면 아이들은 환호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미소 지으셨습니다. 그런 작은 솜씨들이 집안을 환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그리워할 것은 아마 그 조용한 조언, 그리고 거기에 덧붙어 주시던 단단한 손, 손수 만들어 주신 튼튼한 선반과 책상,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를 부드럽게 잇던 유머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에겐 엄격했지만, 남에게는 공정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실패한 설계안을 다시 펴놓고 잘못을 찾을 때에도, 먼저 책임을 묻기보다 원인을 차분히 짚었습니다. “사람이 한 일이라면 고칠 수 있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일어나 다시 해보자는 실천의 신호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후배들이 어려움을 들고 찾아왔고, 아버지는 시간을 내어 앉는 법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급할수록 더 반 박자 늦게 앉아, 더 또렷이 듣고, 더 정확히 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상실만을 말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을 기념하고 이어가자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에 분명한 뜻을 남기셨습니다. 공학을 배우는 이들을 위해 장학금에 기부해 달라고. 많은 말이 필요 없는 유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믿었던 방법대로, 다음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선택입니다. 그 길 위에서 더 많은 손들이 정확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움직이기를, 아버지는 바라셨을 것입니다.
저에게 아버지는 때로 높은 방파제 같았습니다. 넘치지 않게 파도를 막아주되, 제가 스스로 물결을 보는 법을 배우도록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계셨습니다. 때로는 공구 상자였습니다. 필요한 도구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데, 무엇을 언제 꺼내어 써야 하는지는 스스로 판단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서예의 한 획이었습니다. 과감하지만 흔들림이 없고, 시작과 끝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비유들이 오늘 제 마음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결국 아버지는 저와 우리 가족에게 삶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시간표, 책임을 끝까지 붙드는 손, 그리고 유머로 숨을 고르는 지혜를요.
이별의 말은 늘 미숙합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무엇을 덜 말해야 할지, 서툽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태어나셨고, 공대를 졸업하셨고, 30년간 조선소에서 일하셨습니다. 퇴직 후 중소기업의 기술자문으로 후배들을 도우셨고, 지역 청소년 공학 캠프에서 멘토로 서셨습니다. 목공을 사랑했고, 산을 오르셨고, 붓끝에 마음을 모으셨습니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셨고, 시간을 아꼈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셨습니다. 배우자 최영희 여사와 45년을 함께하셨고, 두 자녀와 세 손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조용한 조언과 튼튼한 선반과 책상을 남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대 장학금에 기부해 달라는 소망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삶입니다.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단단한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부재를 배웁니다. 낚싯대에 줄을 매던 손길 없이도, 나무의 결을 살피던 눈빛 없이도, 도면의 오차를 잡아내던 침착함 없이도,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가르쳐 준 리듬을 붙잡을 것입니다. 시간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방식으로, 그리고 때때로 꼭 필요할 때 한마디 농담을 잊지 않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계속 살아 있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 문수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십시오. 아버지가 우리에게 빌려주신 작업대 위에, 우리는 새로운 선반을 얹고, 새로운 도면을 펼치겠습니다. 방파제 끝에서 바라보던 그 해질녘처럼, 오늘의 슬픔 또한 언젠가 잔잔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버지의 기준으로 서로를 세우고, 아버지의 방식으로 일을 마치며, 아버지의 유머로 숨을 돌리겠습니다.
그동안 지켜주신 약속, 보여주신 책임, 남겨주신 웃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가 사랑하신 가족과 일,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희가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