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력Chudosa에서 AI로 생성
사랑하는 가족, 친지, 그리고 한주 어르신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한주, 우리의 아버지, 남편, 이웃, 그리고 삶을 담대하게 걸어온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그분의 생을 함께 되새기고, 그 생이 우리에게 남긴 길잡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1945년 겨울,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젊은 날의 군 복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평생의 업이 될 철물상을 여셨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했고, 늘 문이 열려 있는 가게. 그곳에서 아버지는 30년 동안 한 동네의 버팀목이 되셨습니다. 못 하나, 나사 하나를 파는 일 같아 보여도, 사실은 집과 집 사이를 이어 주는 일이고, 이웃의 하루를 견디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아버지는 카운터 옆 유리병 속의 나사와 와셔를 세심히 정리하고, 줄자와 펜을 같은 자리에 반듯하게 올려두셨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같은 시간에 문을 닫는 그 규칙성 속에, 아버지의 성실과 신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시간 약속은 믿음의 최소 단위다”라고, 늘 담담히 말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퇴직 후에도 아버지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그러나 분명하게. 지역 청소년 장학회에 꾸준히 기부하시며, 조용히, 익명으로, 남들이 모르게 돕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름이 알려질수록 마음이 작아질 수 있다”던 그 말투 그대로, 아버지는 늘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회를 먼저 떠올리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기억하는 그분의 배포는 화통함의 크기가 아니라, 내 것을 덜어 타인을 살리는 넉넉함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산이 먼저 떠오릅니다. 주말마다 어김없이 배낭을 꾸리고,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넣고, 날씨와 시간을 공책에 적어두던 습관. 정상에 오르면, 바람보다 먼저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났고, 돌아와서는 현상된 사진을 한 장 한 장 빛에 비춰보며 “이건 하늘이 너무 세다, 다음엔 반 스텝 낮춰야겠다” 하고 중얼거리셨습니다. 그 엄격함은 타인을 재단하는 칼날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듬는 줄자였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기억도 산에서의 하루입니다. 비가 오던 날이었습니다. 첫 부자 산행이었고, 저는 비 예보를 가볍게 여기다 초입에서부터 온몸이 젖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비닐우산을 반으로 접어 제 어깨 위로 살짝 올려주시더니, “비가 오면 발을 짧게 딛어라. 길이 생각보다 가까워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날 산에서만이 아니라, 인생의 많은 오르막에서 제 발걸음을 잡아준 문장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우산을 나눠 쓰고, 말수 적게, 그러나 끝까지 함께 올라선 그 정상에서, 저는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함은 늘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집에서는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라디오를 켜고 국악 채널에 맞추신 뒤, 조용히 신문을 넘기시던 사람. 주방에서는 된장의 짠맛과 불의 세기를 손끝으로 맞추어, 가족이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해 찌개를 끓이던 사람. 무심한 듯 “대충 먹어라” 하시고는, 그래도 마지막에 두부 한 조각을 제 그릇에 더 얹어 주시던 사람. 우리 가족은 오래도록 그 손맛을 그리워할 겁니다. 그러나 어쩌면 더 그리울 것은, 밥상에 둘러앉아 우리가 털어놓는 크고 작은 걱정들에, 아버지가 내놓던 한마디의 현실적인 조언일지 모릅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한마디면 마음이 정리되곤 했습니다. “불안은 방향이 없어서 커진다. 방향을 잡아라.” 아버지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자, 흔들릴 때 북쪽을 가리켜 주는, 단단한 손이었습니다.
한주 어르신이라 불리던 그 호칭에는, 동네에서 맺은 신뢰가 스며 있었습니다. 가게 문턱을 넘던 단골들은 물건을 사러 왔다가도 잠깐 의자를 끌어와 앉아 속얘기를 풀었고, 아버지는 빈 종이 봉투에 간단한 도면을 그려주듯 답을 내주셨습니다. 그 배려는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대가 돌아설 때, 발걸음이 가벼워지도록 만드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불렀습니다. 나이가 아니라, 태도로 얻은 호칭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검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검소함은 좁아듦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아끼고 더 소중한 데로 보태는 넓어짐이었습니다. 오래된 재킷을 꿰매 입으면서도, 남의 겨울을 위해 새 이불을 기부하시던 분. 본인의 욕심을 줄여 공동체의 숨을 고르게 하던 분. 그 절제의 미덕을, 저희는 생활의 수준이 아니라 삶의 품격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52년의 해로를 함께 하신 어머니, 박말자 여사와의 시간도 그랬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약속, 한 가정을 향한 약속,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 그 긴 세월 동안,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정보다는 손길로, 아버지는 그 약속들을 지켜오셨습니다. 우리 가족, 자녀 둘—저와 이서연—그리고 손주 셋에게, 아버지는 존재만으로 질서였고, 뿌리였고, 바람막이였습니다.
아버지의 삶에는 명확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나눔, 약속 시간의 철저함, 근검절약과 배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기신 말씀, “서로 잘 지내라, 가진 만큼 나누어라.” 이 두 문장은 아버지의 전 생애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잘 지내는 법, 내 몫을 조금 덜어 이웃의 숨을 넓히는 법. 그 가르침은 오늘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앞으로 우리의 선택 속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빈자리는 큽니다. 국밥집에서 “뜨거우니 천천히 먹어라” 하시던 낮은 음성, 산길에서 발걸음 소리를 맞추던 그 호흡, 일요일 저녁이면 사진 봉투를 꺼내 한 장씩 돌려보며 “이건 초점이 살짝 나갔다” 하시던 그 표정. 삶이란 결국 이런 사소한 장면들의 겹침이었고, 우리는 그 겹침 속에서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자리에서 우리는 상실만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은, 누군가의 등을 떠밀지 않고도, 곁을 내어 함께 걷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철물상에서 시작해, 산마루에서 숨을 고르고, 필름 한 롤의 시간을 견디며, 청소년의 내일을 위해 손을 내밀던 길. 그 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어갈 수 있고, 이어가야 할 길입니다. 형식보다 성실을, 소리보다 실천을, 나보다 우리를 택하는 선택들로, 우리는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결정해야 할 때는 미루지 말 것. 남의 실패를 비난하는 대신, 도구를 건네줄 것. 시간이 우리를 흔들 때일수록, 규칙이 우리를 잡아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말하기 어려울 때는 함께 걸을 것. 비 오는 날 우산을 나눠 들었던 그 첫 산행처럼, 말수는 적어도 끝까지 함께 오르는 것이 사랑의 또 다른 문법임을.
사랑하는 아버지, 한주 어르신. 향년 81세의 생을 마치고, 2026년 3월 20일, 긴 여정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간은 우리의 오늘 안에서 계속됩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 손주들, 그리고 아버지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문장과 습관과 웃음은 다른 형태의 현재가 되어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잘 지낼 것입니다. 가진 만큼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을 지키며, 된장찌개의 끓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필름이 감기는 작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벽 라디오의 국악 선율을 들을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를 사랑으로 보내 드립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준 방향과 온기를 가슴에 품고, 우리가 받아 든 이 나침반으로, 남은 길을 단정하게 걸어가겠습니다. 산행 노트의 마지막 장에 오늘을 적어두듯, 우리는 이 이별을 기록하고, 그 기록 위에 새로운 하루를 쌓아 올릴 것입니다.
아버지,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의 검소함이 우리를 넉넉하게 했고, 당신의 엄격함이 우리를 안전하게 했으며, 당신의 배려가 우리를 사람답게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끝까지 함께 걸어 주셔서. 이제 당신의 어깨에 얹혔던 무게를 우리가 나누어 들겠습니다. 서로 잘 지내며, 가진 만큼 나누며, 당신이 사랑한 이 동네와 이 가족을 단정하게 지켜 나가겠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아버지. 우리 마음의 북쪽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남겨 주신 그 방향을 따라, 우리는 흔들려도 다시 서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맑은 날씨의 정상에서처럼, 숨을 고르고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로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